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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해도 길은 있다" 흙수저 리더들, 청년멘토로 뛴다

정승환 기자
입력 : 
2020-11-17 17:53:46
수정 : 
2020-11-19 10: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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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高·야간대 출신 14명
靑夜 모임으로 희망 전달


김동연 주도로 2012년 조직
김홍국·윤종규 회장 맹활약
청년 위해 재능기부 협력

박계신 디케이홀딩스 회장
모교 찾아 후배 4명 채용
사진설명
박계신 디케이홀딩스 회장은 최근 모교 덕수고(옛 덕수상고) 취업박람회에서 후배 4명을 채용했다. 면접 결과 웬만한 대학 졸업자들보다 실무 능력이 뛰어나다고 판단해서다. 디케이홀딩스는 의료용 진단장비 제조회사다. 박 회장은 후배들을 보면서 젊은 시절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가정 형편 때문에 덕수상고 야간 과정을 다녔다. 박 회장은 "고교를 졸업한 후 신탁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 퇴근 후에는 국제대학교(현 서경대)에 다녔다"며 "어렵고 힘들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야간대에서 학위를 땄다"고 전했다. 그는 은행을 다니다가 글로벌 제약회사 로슈로 이직해 재무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나이 마흔에는 MIT 슬론 비즈니스스쿨에 합격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밤이 아닌 낮에 수업을 듣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유학 도중 한국에서 사업 기회가 생겨 10개월 만에 귀국해 다이아텍을 설립했다. 지금의 디케이홀딩스다.

박 회장은 "삶이 고달파도 노력하는 자에게는 길이 있다"며 "야간고·야간대를 다녔지만, 항상 꿈을 갖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청야(靑夜) 총무도 맡고 있다. 청야는 실업계고·야간대 출신 성공한 인사들의 모임이다. 젊은 시절 '주경야독(晝耕夜讀)'하며, 까만 밤을 희망의 파란 밤으로 만든 사람들의 네트워크다.

청야는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네트워크다. 그는 2012년 기획재정부 차관 시절 비슷한 처지였던 사람들 명단을 뽑았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을 하면서 고교와 대학을 다닌 사람들이다. 김 전 부총리는 명단에 있던 14명 모두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비서나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았다. 14명 중에서 1명을 빼고 전부 청야에 참여하기로 했다. 생계를 위해 일과 학업을 병행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이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주자는 김 전 부총리의 뜻에 공감해서다.

14인의 청야 회원은 어려운 처지에 대해 원망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사회로부터 받은 게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로부터 받은 것들을 돌려주고자 한다. 청야 회원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시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내놓기로 했다. 분기에 한번 정도 몸으로 시간을 쓰는 봉사활동과 어려운 처지의 10·20대에 대한 멘토링도 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멘토링 행사는 중단됐지만, 내년께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멘토링 행사를 재개할 예정이다.

청야 회원들 인생은 그 자체가 살아 있는 멘토링 교과서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은 '흙수저 재벌 총수'다. 사업 출발은 병아리였다. 외할머니가 주신 병아리 10마리를 키워 30배가 넘는 가격에 팔았다. 11살 때였다. 이를 밑천으로 삼아 닭과 돼지 등 가축 사업을 시작하면서 이리농림고에 진학했다. 가출 끝에 일반고에 가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을 꺾은 결과였다. 공부보다는 돈을 버는 재미에 빠졌다. 새벽 5시에 기상해 닭과 돼지에게 사료를 챙겨주고 등교했다.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가축들을 살폈다. 그런데 세상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21세 때 축산물 파동이 나면서 사업이 망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시작했다. 고교를 졸업한 후 20년 만에 야간대학 학위도 취득했다. 김 회장에게 일은 취미며 놀이다. 시련은 배움의 시간이다. 부도 위기와 공장 화재 등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이 같은 고난이 있었기에 하림그룹이 성장할 수 있었다. 하림그룹은 총자산 12조5000억원 규모 재계 27위 기업집단이다.

청야 회원 중에는 스포츠 스타도 있다. 최순호 포항스틸러스 기술이사는 축구 국가대표팀 스트라이커였다. 선수 생활 후에는 포항스틸러스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최 이사는 대부분 축구선수가 고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가던 시절 실업축구팀을 선택했다. 1979년 당시 포항제철에 입사해 축구선수로 뛰었다. 집안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배움의 끈을 놓지 않았다. 축구선수 생활을 하면서 광운대 야간과정에 입학했다. 최 이사는 "지금이야 운동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 무대에 진출하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장이 있느냐 없느냐로 사람을 평가했다"며 "광운대 시절 축구와 대학 생활을 병행하며 기말고사도 보고 친구들도 사귀면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울 수 있었다"고 전했다. 최 이사는 "청년들에게 내가 그동안 운동하면서 어려웠던 점과 해결했던 경험, 그리고 미래에 대한 도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전광진 성균관대 중문학과 명예교수는 상고를 졸업한 후 한국은행에 입행했다. 하지만 몰락한 양반집 후예답게 한자와 고서에 대한 지적 탐구심이 대단했다. 퇴근 후 화교학교를 다니며 중국어를 배웠다. 한자로 된 옛글을 제대로 읽고 싶어서였다. 성균관대 야간부에 중문과 과정이 개설되자마자 입학했다. 성균관대 도움으로 대만 유학까지 다녀왔다. 지방 회원으로는 강동헌 코메론 대표가 있다. 강 대표는 부산지역 중소기업인 코메론을 전 세계 줄자 점유율 2위 업체로 키워냈다. 특허 수백 개도 갖고 있다. 강 대표는 부산에 있지만 청야 모임 출석률은 100%다. 청야의 막내는 박기태 반크 단장이다. 박 단장은 서경대 일어일문학과 야간과정을 졸업한 후 반크를 설립했다. 반크는 1999년부터 한국 알리기 활동을 하고 있는 사이버 민간외교사절단이다.

[정승환 재계·한상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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